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차시 1세 (문단 편집) == 개요 == [[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이자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대공(작위)|대공]]. 유능한 지휘관이자 정치가였던 [[후녀디 야노시]]의 둘째 아들로, 16살의 나이에 헝가리 왕위에 오른 뒤 탁월한 통치력과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 오랜 내전과 외세의 침략으로 피폐해졌던 헝가리를 중부 유럽 최강의 국가로 육성했다. '검은 군대(Fekete sereg)'[* 이름이나 활동했던 시기가 비슷한 [[메디치 가문]]의 검은 군단과는 별개의 군대. 메디치 가문의 검은 군단은 그들을 고용한 [[교황]]이 죽자 팔에 검은 띠를 두른 것에서 부대명이 유래했으며 마차시의 검은 군대는 검은 빛의 갑옷을 입어서 검은 군대라 불렸다는 설과 마지막 지휘관이던 하우크비츠의 별칭인 검은 하우크비츠에서 따왔다는 설, 너무나 약탈을 많이 해서 생긴 악명으로 말미암아 검은 군대라 불렸다는 설등 다양한 설이 있다. 이들은 1458년부터 1494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처음 창설되었을때는 6~8천 정도로 시작했으나 점점 수가 늘어나 1485년이 되면 2만 8천 명까지 늘어났는데 그 중 기병만 2만에 달했다.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를 제외하면 동시대에 상비군을 두었던 유일한 유럽 국가인 [[프랑스 왕국|프랑스]]는 가장 규모가 컸던 15세기 후반을 살펴보아도 겨우 4천 명에 불과했다는 걸 생각하면 2만 8천명은 엄청난 수치다. 또한 검은 군대는 중기병에 경기병, 보병까지 다양한 병종을 두었으며 총기를 받아들인 반면, 프랑스의 4천명은 몽땅 중기병이었다는 점도 다르다. 본디 검은 군대는 [[독일인]], [[체코인|보헤미아인]], [[세르비아인]], [[폴란드인]]과 같은 외국인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1480년부터는 [[헝가리인]]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이 해체되고 얼마 안가 헝가리가 조져진 탓에 왜 해체했냐는 비판도 있지만 헝가리 귀족들 입장에서도 나름 할 말은 있었는데 너무나도 많은 유지비로 귀족과 평민 모두의 부담이 가중된 상태라 그 부담을 줄여야 했고 오스만의 잦은 국경 약탈로 대규모 상비군보단 빠른 국경 방어에 걸맞는 속도와 효율을 갖춘 군대의 가치가 커지는 방향으로 전장 페러다임이 교체되면서 그에 따른 변화가 필요해졌기 때문이었다.]라고 불리는 상비 용병대를 창설하여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연이어 격파하고 [[베오그라드|난도르페헤르바르]][* 오늘날 [[베오그라드]]는 [[세르비아]]의 수도지만, 당시에는 헝가리 남부의 가장 크고 중요한 요새가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한 헝가리 남부의 요새들을 보강해 남부 국경의 방비를 강화했다. 또한 보스니아,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등 헝가리 주변의 국가들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공략해 영토를 크게 늘렸으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헝가리의 문화 부흥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체제를 이루는 과정에서 귀족들을 억압하고 각 주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귀족과 평민의 불만을 샀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고 서방 정복에 매달리면서 훗날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공격할 때 서방의 원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 더해 끝내 정당한 후계자를 얻지 못하면서 32년의 치세 동안 일군 업적이 물거품이 되고 헝가리가 몰락하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다만 마차시 1세가 귀족을 무력으로 누른 것도 당시 서유럽에 비해 헝가리나 폴란드는 너무 왕권이 미약한 상태였고, 당시 이들 국가의 최대 적인 오스만 제국이 전제군주국이란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전제군주국인 오스만 제국이 동원하는 병력과 봉건 영주들의 연합체인 헝가리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차이가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단결이나 통치의 효율면에서도 큰 차이가 날수밖에 없다. 당장 헝가리가 멸망하는 [[모하치 전투]]에서도 헝가리 영주들은 국왕의 명령을 받고도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결국 헝가리군은 [[오스만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즉 '''마차시 1세의 왕권 강화책은 당시 시대의 요구였던 것이고, 마차시 1세 사후 이런 왕권 강화정책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결국 헝가리는 멸망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태는 똑같은 봉건 영주 연합체국가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후에 그대로 [[폴란드 분할|되풀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